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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나에게는 그리 잘 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좀처럼 글쓰기가 늘지 않았던 거다. 원래 나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글쓰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책을 읽으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건(교통사고, 신장병 등)으로 인해 거의 초등학교 절반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으며, 몸이 성치 않아 친구들과 밖에서 놀 수도 없었던 나에게 책은 유일한 친구였다. 많은 책을 읽기보다도 한 권을 수도 없이 읽곤 했다. 그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학과 공부로 인해 책읽기를 등한시하게 되면서 점차 독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작문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가득 들어 있는 어려운 책을 권유 받았다. 그 때 나는 이러한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책만 읽어야 할까?” “이런 책을 읽으면 정말 글을 잘 쓰게 될까?” 책 속에 나오는 무거운 개념들은 어린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생각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 맞는 상황을 적절히 나타내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국어보다 수학을 좋아했던 나는 이과를 선택했고, 결국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 때도 물론 글쓰기는 젬병이었다. 그러던 내가 20여년 후 언어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글쓰기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전환점은 호주 박사과정 중에 있었던, 지도 교수와의 소크라테스 식 문답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개념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글에는 죽은 글과 살아 있는 글이 있다. 비록 영어로 가르친 것이지만, 호주에서 어린 학생들에 글쓰기를 지도하면서, 이를 확인했다. 모든 사람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밑바탕으로 쓰려고 하는 주제에 관련된 개념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그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먼저, 대화를 통해 그들이 쓰고자 하는 내용을 조리 있게 정리한다.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아우트라인을 작성한다. 끝으로, 아우트라인를 기계의 설계도나 인체의 구성도처럼 사용하여 그들이 쓴 문장을 거의 고치지 않고 재구성한다. 놀라운 사실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글들이 하늘로 치솟는 용처럼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무기가 용이 되다니? 글쓰기에 취미가 없는 학생들은 점차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들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의 공통점이 자신이 읽었던 책에서 익힌 좋은 문체를 도구로 삼아, 이해하기 쉬운 흐름으로 개념들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아는 번역사 중에 책을 천 권이나 읽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영어를 번역할 때 그렇게 많은 책 속에서 얻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책의 문체보다도 저자의 의도에 중점을 두고 책을 읽었던 것이다. 우리가 읽은 책의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의 글쓰기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표절이 아니다. 오히려 창작을 위한 건전한 모방이다. 나 또한 좋은 책을 발견하면, 저자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주로 그 저자가 많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체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결론적으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자기가 쓰고자 하는 주제를 조리있게 풀어나가는 생각의 힘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념을 표현하는 문체를 익히는 연습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