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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가라사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거늘.” “예수 가라사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내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주위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곧잘 들었었다. “가라사대”라는 말을 들으면, ‘또 잔소리시네.’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언제인가 왜 어른들은 “가라사대”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대한 성현의 이름과 “가라사대”, “왈”, “말씀하기를”이 붙어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이 주장하는 의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성현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호주 박사과정 중, 인용문에 대한 시각에 있어 동·서양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지도 교수와의 대화 도중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아리스토텔레스) 교수: “논문에서 이런 인용이 있을 때 그 의미를 알아요?” 필자: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말 아닙니까?” 교수: “그것은 동양적 사고에요.” 필자: “네?” 교수: “다시 말해서, 한국이나 일본 등의 동양권에서는 ‘대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지만, 영어권에서는 ‘나는 원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에 동의한다.’ 이 말이에요.” 이 대화는 내 머릿속에서 깊이 각인되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잊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날의 대화는 내 학문 생활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교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인용문에 대해서 동양권 학생은 이곳 호주를 비롯한 영미권 학생에 비해 상당히 소극적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동양권 학생은 인용문을 볼 때, 저자가 “서양의 권위자인 대가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 주장은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영미권 학생에게 이것은 저자 자신의 주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동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용문 다음의 괄호 안에 들어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점에 따라 주인공이 되느냐 조력자가 되느냐 하는 커다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는 서양인들의 비판 정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을 주창했던 학자라 할지라도, 이를 절대적 권위를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를 능동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