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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번역이라고 하면 흔히 난해하고 문학적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필자는 단연코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삼라만상 속에서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을 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물론 소설가의 예술가적인 필체와 원문이 속하는 언어권의 문화적인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번역에 어려움이 다른 분야보다도 크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소설도 인간이 쓰는 것이며, 글쓴이가 우리와 다른 별세계의 인간이 아닌 이상, 원문 속에서 글쓴이와 같은 호흡과 정서를 교감할 때 우리는 그가 표현하는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가령 헤밍웨이의 예를 들어보자. 필자가 헤밍웨이의 “A Farewell to Arms(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작품을 번역한다면, 우선 작품을 읽기보다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 조사할 것이다. 다음에 헤밍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심도 있게 조사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것이 뭐 필요한가?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파악하기만 하면 되지, 굳이 고증학적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고증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내가 헤밍웨이가 돼서, 작품이 배경이 되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라는 무대 속에서 어떻게 고뇌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써 내려갔는가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고 싶고, 직접 배경이 되는 장소로 가고 싶다. 하지만, 시간적∙공간적∙경제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는 못하고, 인터넷이나 참고 서적을 통해 현재의 시각이 아니라 당시의 시각으로 그 시대상황을 느끼고자 할 것이다. 각 장소의 사진을 보면서 헤밍웨이가 그려내는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주인공 “프레드릭 헨리”와 그의 연인 간호사 “케서린 버클레”의 사랑을 느끼고자 할 것이며, 이들의 사랑과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감동을 온 몸으로 깊이 느끼고자 할 것이다. 다음에 이러한 거대한 파노라마를 헤밍웨이가 어떤 문체로 그려내는가를 보고자 할 것이다. 모든 작가는 각기 특유한 문체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헤밍웨이와 유사한 한국 작가의 문체를 찾을 것이다. 위와 같은 그림화와 문체 발견에 대한 수고를 할 때 비로소 헤밍웨이가 영어권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야기를 한국 독자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단지 원문을 보고 직역이 아니면 의역을 한다는 구태의연한 자세를 버리고, 보다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각도로 원문을 번역하는 것이 소설 번역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