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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유학은 하나의 필수 관문으로 통한다. 물론 필자도 영어권 국가인 호주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덕택인지, 한국에서 어렵지 않게 번역회사의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었다. 따라서 필자 자신도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과연 유학이나 해외에서의 경험이 번역가가 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경력인 것인가? 한국에서 영어책을 탐독하고 영어권 국가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으로는 영어식 사고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안정효 씨를 떠올리곤 한다. 안정효 씨는 외국에서 생활하거나 유학한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얀 전쟁” 등 많은 서적을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거나 영어로 창작한 분이다. 그는 본인의 서적을 통해 서강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영어 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비록 외국에 가지는 않았지만 영어권 출신 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유학을 갔느냐 외국에서 생활을 했느냐 하는 문제가, 번역가의 길을 들어서려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번역가가 되기 위한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필자와 함께 일하고 있는 연구원도 거의 대다수가 유학이나 장기간 외국 체류 경험이 없다. 하지만, 필자와 함께 공부하고 일하면서, 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그들이 영어식 사고나 필자가 항상 강조하는 형상화(visualization)를 경험하면서 이를 번역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고 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언어를 도구로 생각하는 기능주의적 입장에서는, 언어는 단지 사실이나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수단일 뿐이며, 그 안에 어떠한 얼이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주의의 관점은 인간의 사상이나 문화를 전제로 하여 각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맥락적인 면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언어로 쓰인 텍스트를 볼 때는 단지 구문이나 문법, 단어의 뜻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형상화라는 토대 위에서 각 언어별로 표현하는 문체와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문맥을 깊이 성찰할 때, 영어를 비롯한 많은 외국어의(혹은 외국어로의) 번역에서 원어민과 같이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텍스트를 얼마만큼 보는가가 아니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성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